실리콘밸리의 '스마트 머니'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이팔 마피아의 대부이자 팔란티어의 창립자인 피터 틸이 엔비디아와 테슬라 주식을 매각하고, 대신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는 AI 소프트웨어 기업(팔란티어 등)으로 자금을 이동시킨 것은 기술 시장의 패러다임 변화를 시사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는 AI 인프라 구축 단계에서 애플리케이션 및 플랫폼 활용 단계로 자본의 관심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신호다. 월가 일각에서 제기되는 'AI 버블론'과 마이클 버리의 하락 배팅에도 불구하고,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이 여전히 낙관론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하드웨어의 단순 보급을 넘어선 '질적 진화'에 대한 기대감이 깔려 있다.
이러한 자본 흐름의 변화는 반도체 기술 진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드웨어의 성장 한계론을 돌파하기 위해 SK하이닉스와 TSMC가 맺은 '원팀(One Team)' 동맹은 그 기술적 해답이다. 2026년 초 공식화된 이 협력은 6세대 HBM인 'HBM4'를 통해 '메모리 장벽(Memory Wall)'을 허무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하드웨어 구조로는 거대언어모델(LLM)의 데이터 병목 현상을 해결하는 데 한계가 봉착했기 때문에, 공정 미세화를 넘어선 패키징 단계의 아키텍처 혁신이 필수불가결해진 것이다. 즉, 피터 틸이 하드웨어 주식을 판 것은 AI의 끝이 아니라, '범용 하드웨어' 시대의 종말과 '맞춤형 초고성능 아키텍처' 시대의 개막을 예견한 것으로 해석된다.
결국 기술 시장은 두 갈래 길에 섰다. 엔비디아로 대표되는 하드웨어 인프라의 폭발적 양적 팽창이 조정기를 거치며 옥석 가리기에 들어가는 한편, HBM4와 같은 차세대 인터커넥트 기술이 AI 모델의 성능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릴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이다. SK하이닉스와 TSMC의 동맹은 단순한 기업 간 협력을 넘어, AI 산업이 '설비 투자(Capex)의 시대'에서 '실질적 효용(Utility)의 시대'로 넘어가기 위한 기술적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제 단순히 '누가 칩을 만드는가'가 아니라, '누가 칩의 한계를 극복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