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촉발한 메모리 호황
인공지능(AI) 혁명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역대급 호황을 선사하고 있다. 2026년 2월 현재 양사는 AI 인프라 확장으로 인한 글로벌 메모리 칩 부족 사태 속에서 기록적인 실적을 기록 중이다. SK하이닉스는 2025년 4분기 영업이익률 58%를 달성하며 파운드리 최강자 TSMC의 54%를 넘어섰고, 연간 영업이익률도 49%에 이르렀다. 이는 AI 데이터센터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 수요가 폭증한 결과다. 그러나 이 화려한 실적 이면에는 미국의 자국 중심 공급망 재편이라는 거대한 지정학적 파도와 격화되는 기술 패권 경쟁이 숨어있다. 이제 투자자의 시선은 단순히 누가 더 빠른 HBM을 만드느냐를 넘어, 누가 더 안정적인 공급망과 핵심 고객을 확보하느냐로 옮겨가야 한다.
지난 2월 6일 전자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메모리 공급 가격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계약 기간을 단축하고 있다.
이는 AI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이 공급자에게 넘어왔음을 보여준다. 양사는 기존 장기 고정가격 계약에서 벗어나 분기 또는 월 단위 단기 계약과 사후정산 방식을 도입하고 있다. SK하이닉스의 역대급 영업이익률은 현재의 시장 지배력을 증명하지만, 이 수익성을 지키기 위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다.
기술 경쟁의 최전선, HBM4와 '맞춤형 전략'의 충돌
삼성전자는 2월 12일 차세대 제품인 HBM4를 세계 최초로 양산 출하했다고 발표하며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가속기 베라 루빈(Vera Rubin)에 공급을 시작했다. 이는 HBM3 시장에서 SK하이닉스에 내줬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최태원 회장이 직접 2026년 2월 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 협력을 논의하는 등, 단순한 부품 공급사를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최 회장은 "과거 SK하이닉스의 개발 속도가 엔비디아보다 약간 느렸지만, 최근에는 엔비디아의 요구를 앞서가고 있다"며 기술 경쟁력에 자신감을 드러냈다. 업계는 SK하이닉스가 올해 HBM4 시장에서 약 70%의 점유율을 유지하며 엔비디아 최대 공급사 지위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한다.
여기서 주목할 함의는 SK하이닉스가 내세운 맞춤형 HBM(Custom HBM) 전략이다. 이는 고객사의 요구에 따라 최적화된 HBM을 제공하겠다는 것으로, 범용 제품을 대량 생산하던 기존 메모리 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도다. 이는 단순히 기술 사양 경쟁을 넘어, 엔비디아와 같은 핵심 고객과의 관계를 더욱 깊숙이 묶어두는 락인(Lock-in) 효과를 노린 포석으로 풀이된다. 투자자 관점에서 이는 단기적인 HBM4 최초 출시 타이틀보다 더 중요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만드는 핵심 변수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격전지 '미국', 공급망이 곧 경쟁력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파예트에 40억 달러 규모의 HBM 첨단 패키징 공장 건설을 본격화하고 있다. 2024년 10월 투자 협약을 체결한 이 공장은 2028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보호무역주의 기조와 공급망 재편 압박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응 카드다. HBM 생산의 수율과 성능을 결정하는 핵심 후공정 기술인 패키징 시설을 미국 본토에 둠으로써, SK하이닉스는 최대 고객사인 엔비디아 바로 곁에서 차세대 HBM4 물량을 공급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는 단순한 생산 능력 확대를 넘어선 지정학적 리스크 헤지(Hedge) 전략이다. 향후 발생할 수 있는 관세 장벽이나 수출 통제 등의 불확실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미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 혜택까지 노릴 수 있다. 투자자에게 이는 SK하이닉스가 잠재적 무역 분쟁의 영향권에서 한 발 벗어나 안정적인 북미 공급망을 선점했음을 의미한다. 삼성전자의 대응 전략이 구체화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SK하이닉스의 이러한 발 빠른 움직임은 경쟁 우위를 점하는 결정적 한 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확산되는 전선: 국내 데이터센터
국내에서는 OpenAI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데이터센터 건설에 착수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2025년 10월 1일, 샘 올트먼 OpenAI CEO가 이재명 대통령,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을 만나 공식 발표한 이 계획은 OpenAI의 5,000억 달러 규모 스타게이트(Stargate)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SK하이닉스는 전라남도에, 삼성전자는 포항에 각각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2026년 2월 10일 국회 청문회에서 오는 3월부터 건설이 시작될 것이라고 밝혔다.
포항이 OpenAI의 한국 첫 투자처로 선정된 배경에는 경상북도 지역의 안정적인 전력 인프라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AI 데이터센터는 막대한 전력을 필요로 하는데, 대용량 전력 공급이 가능한 입지가 결정적 요인이 된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메모리 공급 구조다. OpenAI는 2029년까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로부터 월 90만장 규모의 DRAM 웨이퍼를 공급받기로 했다. 이는 전 세계 DRAM 생산량의 약 40%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양사는 단순히 데이터센터 부지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OpenAI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전체에 핵심 메모리 부품을 공급하는 전략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이는 해외에만 의존하던 AI 인프라 수요를 내수 시장으로 끌어오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국내에 대규모 데이터센터가 구축되면 양사는 최첨단 HBM과 DRAM 제품의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는 동시에, 글로벌 AI 기업들과의 긴밀한 기술 협력을 통해 국내 AI 생태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기회를 잡게 된다. 삼성SDS는 OpenAI와 AI 데이터센터 개발·구축·운영 파트너십을 맺었고, 삼성중공업과 삼성물산은 냉각 비용과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해상 부유식 데이터센터 개발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지정학적 리스크와 무역 분쟁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홈그라운드'를 구축하는 셈이다.
기술보다 공급망, 점유율보다 포지셔닝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 패키징 공장으로 미국 현지 공급망을 선점하고, 맞춤형 HBM 전략으로 엔비디아와의 락인 효과를 강화했다. HBM4 시장 점유율 70% 전망과 최태원 회장의 젠슨 황 직접 면담은 단순한 부품 공급사를 넘어선 전략적 파트너 위상을 보여준다. 반면 삼성전자는 HBM4 최초 출하로 기술 격차를 좁혔지만, 미국 공급망 구축 지연은 장기 밸류에이션에 부담 요인이다.
결국 이번 메모리 슈퍼사이클의 승자는 최첨단 제품을 가장 먼저 내놓는 기업이 아니라,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도 핵심 고객 곁에 가장 가까이 자리 잡은 기업이 될 것이다. 투자자는 분기 실적의 등락보다 미국 공급망 투자 진행도와 주요 고객사 경영진과의 밀착도를 더 중요한 투자 지표로 삼아야 한다.


